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우금치 전투 (문단 편집) === 화력 === 관군·일본군에 비해 농민군은 화력에서 절대적으로 열세였다. 관군 본대에 배치된 크루프제 야포, [[개틀링 기관총|개틀링]] 기관총에 더해 개인화기로 스나이더 소총 등 신식 무기로 무장한 관군·일본군과 달리 농민군은 [[조총]]과 소수의 관군 노획 화기로 무장했고, 그것조차 없는 나머지 농민군은 죽창이나 창, 농기구 등 재래식 무기를 주력으로 사용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조총의 사정거리는 겨우 100-400m 정도이고 재래식 무기는 근접 무기였다. 그래서 밀집대형과 [[전열보병]]으로 적을 밀어버리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으나, 관군은 이러한 밀집대형을 제대로 카운터 칠 수 있는 개틀링 기관총을 다량 보유하고 있었다. 관군·일본군의 총기류들은 사정거리가 훨씬 길어 원거리에서 동학 농민군을 가볍게 쏠 수 있었다. 볼트액션식 소총이었던 무라타 소총과 스나이더 소총의 사정거리가 최대 1.8㎞. 이외 평균적인 소총의 사정거리가 0.8-1.4㎞ 정도였으니, 관군과 일본군이 평균적인 실력만 갖추어도 농민군을 명중시킬 수 있었다.[* 대중매체에서는 돌격을 할때 처음부터 달려가는 식으로 표현하는데 그렇게 하면 도착할때쯤 지쳐서 아무것도 못하고 죽게 된다. 그래서 지근거리에 도달할때 까지는 속보로 걸어가기 때문에 엄청난 피해를 입을수 밖에 없다.] 또한 후장식/볼트액션 소총류는 무기 특성상 전열 내의 군인들 간격을 어느 정도 벌린 채로 '''엎드려서''' 사격할 수 있었는데, 조총은 밀집대형으로 서서 쏴야 하는 구조라서 농민군은 자신들은 맞기 쉬우면서 상대를 맞히기는 어려운 난처한 상황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또한 전장식인 조총은 아무리 빨리 쏴도 1분당 겨우 2회를 쏠 수 있어서, 1분당 압도적 물량공세를 시전 가능한 개틀링이나 그보단 못해도 짧은 시간 안에 상대적으로 연사가 수월한 후장식/볼트액션 소총 저격을 당하지 못했으며, 이것조차 없는 농민군에 대해서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게다가 그들이 보유했던 개틀링은 동학 농민군과 관군의 최초 접전이었던 1차 봉기 초반과 달리[*사실 1차 봉기의 중후반으로 넘어가면 전주성 전투 당시 성문 인근 감제 고지에 크루프제 속사포와 함께 배치하고 망루를 설치하여 관측하다가, 이걸 제거하려고 출성한 동학 농민군을 개틀링의 화력 지원과 함께 레버액션식 소총을 장비한 채 산병전을 벌여 녹이는 식으로 활용했다. ] '''아주 잘 쓰였기에''' 밀집대형으로 몰려오는 동학 농민군들을 쉽게 표적으로 삼아 전멸시켰다. 동학군 1차 봉기 때는 관군이 전술적 오판으로 패배하고 신식 무기인 개틀링까지 빼앗기는 수모를 겪었지만, 신식 무기에 대한 지식이 없고 추가적인 보급이 불가능한 농민군이 개틀링을 정확히 알고 이용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동학군은 기껏 탈취한 개틀링을 제대로 분석하지 못했고, 그 결과 우금치 전투에서 개틀링을 향해 밀집대형으로 돌진했다가 결국 움직이는 과녁 신세가 되고 만다. 물론 동학농민군이 보유한 무기 상황을 생각해보면 개틀링 대처법을 알았다 한들 실천할 수가 없었다. 수십 년 뒤에 벌어진 [[제1차 세계 대전]]에서도 기관총 때문에 발생한 참호전 양상을 파훼하지 못해서 신무기인 탱크의 등장과 미군의 물량 대공세가 이어지기 전까지 교착상태에 빠졌다. 당시에 기관총으로 구축한 방어선은 가히 무적에 가까웠다. 20세기 유럽의 식민제국들도 하지 못한 것을 19세기 농민봉기군들이 무슨 수로 해낸단 말인가? 무기들의 화력과 사정거리도 문제였지만 조선 관군과 일본군의 무기보다 동학 농민군의 무기들, 특히 조총이나 화승총 등이 날씨를 제법 타는 것도 문제였다. 불을 붙인 다음에 쏘는 구식 총들의 구조상 날씨가 습하거나 하면 불이 잘 안 붙는다. 문제는 우금치 전투가 일어났던 시기가 진눈깨비도 내리는 시기였기에 습기와 진눈깨비를 막을 수 없었던 동학농민군 입장에선 그나마 있던 구식 화기마저 쓰기 불리해서 화력이 약해졌다. 반면, 단발식 소총류는 그냥 탄환만 갈아끼우면 되므로 날씨에 거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이런 사정들 덕분에 '''신식 무기로 무장한 조선 관군과 일본군 : 구식 무기로 무장한 동학 농민군 = 250 : 1, 혹은 500 : 1''' 이라는 말도 안 되는 화력 격차로 동학 농민군이 패배하고 말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